사회

‘인천5·3민주항쟁’, 안기부 지휘·조정 사실 공문서를 통해 최초로 드러나

1986년 ‘인천 5·3민주항쟁’ 수사 당시 검찰은 들러리, 안기부가 구속 여부 직접 결정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국가기록원으로부터 받아 분석한 3100여 쪽의 ‘인천 5.3시위사건’ 기록물 통해 33년 만에 공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지선)가 국가기록원으로부터 받은 <인천 5.3 시위사건>(정식명칭 ‘인천5·3민주항쟁’) 기록물을 분석한 결과,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인천5·3민주항쟁’을 직접 지휘·조정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1986년 5월 3일 인천의 주안역 앞 시민회관 사거리에서 시민단체, 대학생, 노동자 등 시민 수천여명이 모여 직선제 개헌, 독재정권 타도 등 민주화 요구를 분출시키자, 안기부 등 공안당국은 이 시위 직전부터 기획한 민주화운동에 대한 강경 대응방침을 전면적으로 실행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에 따르면 안기부는 △사건 명칭 작명 △대공방침 지시 △구속 대상 선정 △훈방자 결정 등 모든 것을 ‘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지휘했다. 즉, 검찰의 지휘를 받아야 할 수사기관(안기부)이 도리어 검찰을 지휘한 것이다. 

안기부는 이 시위를 ‘5.3 인천소요사태’라고 명명하고 주요 참가자들을 발본색원한다는 방침을 검찰과 경찰에 내려보냈다. 1986년 5월 7일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인천분실장이 경기도경찰국장, 인천지검장에 보낸 전언통신문 ‘5.3 인천소요사태 수사 조정(수사 24130-6969)’에 따르면 ‘인천5·3민주항쟁’을 ‘인천소요사태’라고 규정하고, 소요의 배후 지령자와 불순단체 간부 및 연계조직을 발본색원 의법처리 차원에서 수사할 것을 지시했다. 

◇훈방도 검찰이 결정하지 못하고 안기부 결심 기다려 

안기부가 구속 수사 대상자까지 직접 선정한 사실이 드러났다. 기록물에서 발견된 ‘구속 수사 통보’ 수사(223110-)에 따르면 인화공사(안전기획부 인천분실의 위장명의) 김○○이 경기도경찰국에 구속수사 대상자를 지목해서 통보한 것을 알 수 있다. 

안기부는 훈방조치까지 모든 것을 세세하게 지휘 조정해 사실상 검찰 위의 상급기관으로 작동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경기도경찰국이 생산한 ‘5.3 인천 시위관련자 수사 상황보고(86년 5월 14일)’에 의하면, ‘인천5·3민주항쟁’으로 조사한 김 아무개에 대하여 안기부, 검찰 합심으로 훈방의견으로 안기부 본부에 조정 중이라는 내용이 있다. 훈방도 검찰이 결정하지 못했으며 안기부 본부의 방침을 받아야 했다. 또한 인천동부경찰서가 생산한 ‘5.3사건 추가 검거 수사 상황’에 의하면, 6건의 훈방 조치에 대해 안전기획부 김○○와 송○○가 조정한 내용도 있다. 

당시 안전기획부는 각종 공안사건을 지휘 조정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번 <인천 5.3시위사건> 기록물에서 처음으로 그 내용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망원(프락치) 활용, 교도소 접견 비밀 녹취 등 경찰의 인권침해 

당시 경기도경찰국에서 생산된 각종 보고서에는 공안당국의 인권 침해적인 수사행태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다. 

부천경찰서 ‘5.3 관련 수배자 수사 진행 상황(1986년 5월 24일)’에 따르면 당시 인천지역 노동운동 단체 내부의 ‘망원網員(프락치)’ 활용, 수배자 검거를 위한 망원 부식과 관련된 기록이 있으며, 경기도경찰국 ‘구속피의자 신병 인도 상황’에 따르면 구속 수감된 사람에 대한 교도소 내 접견 상황 비밀 녹취 등 당시 의혹으로 제기된 불법적인 경찰 수사행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인천5·3민주항쟁’ 수사 당시 고문피해 주장에 대한 경찰의 자체 조사 보고서를 살펴보면, 부천경찰서 문귀동 경장 등이 작성한 OO대학 여대생 2명의 관련 조서가 보고 누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부천경찰서 경찰이 시위 가담 혐의로 OO대학 여대생을 조사하면서 배를 발로 차고 바지를 내린 채 속옷을 보여주면서 조사를 진행하여 성적 수치심을 유발했다는 성추행 고문 주장이 제기됐다. 또한 무자비한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는 장신대 학생 주장 등이 있자 경찰이 자체 조사하여 불법 사실이 없었다는 보고서를 만들지만, 이 내용에서조차 조서가 누락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는 사실의 은폐를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문귀동 경장은 ‘인천5·3민주항쟁’한 달 뒤인 1986년 6월 부천서에서 성고문 범죄를 일으킨 가해자이다. 

◇학생운동에 대해 모든 범죄 최우선 수사 지시, 특진 등 포상 제시 

또한 이번 기록물에서 당시 공안당국의 민주화운동 대응방침을 확인할 수 있는 데, 학생운동을 간첩검거 수준으로 모든 범죄에 최우선으로 하여 수사하라는 지시를 하고 포상과 문책 등 상벌까지 제시했다. 

1986년 5월 1일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 명의로 된 ‘민민투 등 용공 지하조직 수사계획 하달(내무부 정사 02656- )’에 따르면 당시 학생운동 조직에 대하여 간첩검거 차원에서 모든 범죄에 최우선으로 하여 수사 활동을 전개토록 하고, 정보·수사·대공 합동전담수사반을 편성하여 5월 31일까지 검거를 완료하도록 하였으며, 검거 유공자에 대하여 특진, 표창, 현상금 등 후한 포상과 관내 범인 장기은닉 등 수사를 태만할 경우 관서장 문책 등 상벌을 제시했다. 

이러한 윗선의 강경 대응 주문은 이틀 뒤 5·3시위에서 경찰의 인권침해 및 무리한 수사로 귀결됐다. 자제력을 잃은 경찰은 이 시위를 사회주의 국가 건설 기도 사건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1986년 5월 3일 ‘인천5·3민주항쟁’이 발생하자, 안전기획부의 지휘 아래 경기도경찰국 등 각 기관은 ‘인천5·3민주항쟁’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특히 부천경찰서의 ‘5.3사건 수사상황보고(1986년 5월 8일)’에 따르면 시위 현장에서 연행한 서울 장신대 대학생들이 “장신대 민민투를 결성한 후 5월 3일 신민당 개헌서명 현판식에 전위대를 구성 제2의 광주사태와 같이 국가를 전복할 시기로 잡고, 1차로 민정당사를 방화하고, 2차로 경찰국을 기습하여 무기를 탈취한 후 방화하고 탈취한 무기로 무장 후 인천 시내 파출소를 기습 후 무기를 모두 탈취하여 인천을 해방구로 만든 다음 서울로 진입하여 관공서를 점거하고 폭력으로 군사독재체제를 전복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로 기도”했다는 것이다. 이 수사보고서는 관계기관에 보고됐고, 이는 다시 경기도경찰국, 내무부, 대 검찰국 등에서 작성한 진상 보고서에 인용됐다. 

그러나 부천경찰서는 불과 9명으로 구성된 장신대 학생들이 국가전복을 기도한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사실관계가 틀린 배후조직 계보도와 엉터리 조직 현황 보고서를 1986년 내내 계속 만들어 보고하였다. 1986년 초에 이미 없어진 전학련(대학 간 총학생회 연합 조직)의 산하 조직으로 장신대 민민투를 그려 넣거나, 당시 연행자들이 조직이 생기지도 않은 민민투에 1985년 7월 가입(민민투는 1986년 봄 이후 발족)하였다고 하거나, 자민투가 없는 대학에 자민투에 가입하였다고 억지를 쓰거나, 민민투와 자민투에 동시에 가입하였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었다. 당시 부천경찰서로 연행된 장신대 학생들은 침대봉과 야구방망이로 머리, 얼굴, 목덜미 등을 구타당하는 등의 고문 피해 사실을 호소했다. 당시 공안당국은 장신대 학생들을 소요죄 등으로 기소 또는 수배 조치하였으나, 국가전복 기도 사건의 총책으로 지목된 탁 아무개(징역 4년, 집행유예 4년 선고) 씨는 공안당국이 고문을 통해 무리하게 만들어 낸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번 기록물을 분석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지선 이사장은 “전두환 정권은 86년 5월 ‘인천5·3민주항쟁’을 정국 운영의 반성 점으로 삼기보다는, 위기에 처한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민주화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했다. 이를 위해 안기부(현 국정원)는 ‘국가 대공 기능 강화 방안’을 마련했고, 이 방안을 토대로 대공조직이 급격히 확대, 점점 커지는 민주화 요구를 진압해 나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86년 6월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치사 사건 등이 일어났다”고 진단했다. 지선 이사장은 “공안당국의 불법적인 수사행태에 대하여 시효가 지났다 하더라도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고, 안기부의 수사 조정권 등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법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며 “고문 피해자 등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분석한 <인천 5.3 시위사건> 기록물은 1986년 5월 3일 인천시 주안역 앞 옛 시민회관 사거리 부근의 민주화 시위와 관련하여 인천지방경찰청(옛 경기도경찰국)이 생산한 문서로, ‘시위사건 종합 수사 상황’, ‘종합수사보고’, ‘피의자에 대한 수사경위보고’, ‘수사지휘품신’ 등 3100여 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기록물은 국가기관이 생산한 자료로 ‘인천5·3민주항쟁’의 정부 대응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을 가능하게 하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 연구 수준을 향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를 위해 국가기관에서 생산한 민주화운동 사료 수집과 분석을 계속 추진할 예정이다(보도자료 끝. 붙임자료 2종 있음). 

인천5·3민주항쟁은 1986년 5월 3일 인천 주안역 인근 인천시민회관 앞 광장(현 시민공원역 일대)에서 당시 야당인 신한민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인천시지부 결성대회를 이용해 수도권 지역 민주화운동 단체 등 수만여 명이 집결하여 군부독재 타도 등을 주장한 시위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1987년 6.10민주항쟁 이전 최대 규모의 민주화운동으로 올해 33주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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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빈 기자

청소년 기자단 '혜윰'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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